호두가 새끼를 낳은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 유난히 걸음이 별나고 눈에 호기심이 잔뜩 담긴 녀석이 보였지요. 자라면 어지간히 개구장이겠구나 싶은 느낌에 손오공 헬멧을 쓴 얼굴이라 오공,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딱 봐도 헬맷. 딱 봐도 손오공. 신매니저가 개척하고 있는 직관주의형 작명법은 1초에 하나씩 이름을 지어낼 수 있어 호두 군단같은 다수의 개체를 맞닥뜨릴 때 매우 적절하지만 시종일관 이름에 기품이 없으며 그마저도 절반쯤은 식료품 명칭이라는 단점이 있지요.(보리, 호두가 전형적인 경우입니다.) 박리다매의 한계랄까요. 그나저나 정상급 미치광이가 될 것 같던 오공이가 나날이 기대를 져버리고 있습니다. 호두군단은 대체로 순하고 얌전한데 그 중에서도 가장 센티멘털하고 감성적인 성격으로 자라고 있는 고양이가 바로오공이라는 현실.이름이 손오공인데,이름이 손오공인데. 눈은 늘 우수에 잠겨 있고 잘 때조차 단아하고 장난에 관심이 없고 혼자의 시간을 좋아하는 사색 고양이. 성격으로 보자면 베르테르, 데미안, 릴케, 카프카, 몽테뉴라 불러야 좋을 녀석이지만그래서야 어디 부를수나 있겠어요. "걔 어디갔지 그.....""아..걔...그. .....""카...칼릴지브란?""바..바이런 아니었습니까 보스?"이런 대화가 이어져녀석을 부를 때마다 모두가 머리 쥐어뜯는 상황이 발생하겠지요. 그나저나 말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돌아와조용히 세상을 응시하는 촉촉한 눈의 오공이를 보고 있으면하루내 멀리 서있던 평화로움이 한발짝 다가오는 기분이 듭니다. 어쩌면 오늘 나를 스쳐간 말들은 대부분 필요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내 말들도 역시 그렇지 않았을까.그제서야 그런 생각을 하며그제서야 두 어깨와 머리에 쌓인 세상의 먼지를 털어냅니다. 이런 눈을 가진 오공이 덕분에, 이런 새끼를 낳아준 호두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