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개인의 가구, 애프터문
담백한 가구, 그리고 개와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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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무 일 
일 어 나 지  않 는 날 의
행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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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에 대학에 입학해 

스물두 살에 퇴학당하고

스물네 살에 다른 대학에 입학했다.

평온한 생활이 시작된 지 6개월,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술만으로 해결될 거라 생각해

3000cc에 육박하는 조직을 덜어내고 보니

다른 장기에 전이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항암 치료를 거절하고 

짧은 입원을 끝낸 뒤 학교로 돌아갔다.

한참 동안 잘 걷질 못하여서

강의실을 옮길 때마다 걷다 쉬기를 반복하였다.

감기조차 걸리지 않을 만큼 건강체였던 나는

몸 아픈 이들의 불편을 그때 처음 알았다.

횡단보도 초록 불이 그토록 짧은지,

버스의 계단이 그렇게 높은지,

 오르막길의 작은 경사가 얼마나 막막한 것인지에 대해.





 

그런 상태로 학교에 돌아갈 만큼

학업에 애정이 컸나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

그런 것은 처음에도 없었고

수술을 한 뒤 생겨나지도 않았다.

내가 원한 것은 

살던 대로 이어지는 일상, 그것이 전부였다.




 

지난날들은 뜨겁고 찬란하였으나

일상이 무너진 시간이었다.

영문을 모른 채 오래도록 절룩거린 뒤 겨우 잡은 안온함은

말 그대로 별것이 아니었다.

봄이 오면 꽃을 구경하고 수업에 들어가고,

기숙사에 돌아가 잠을 자고

아르바이트 비를 받는 날이면 술을 마시고,

그렇게 일학년이 이학년이 되고 삼학년이 되는 일.

흔해빠진 대학생의 일상, 

나에게는 몹시 간절했던 풍경들.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것이 다르다.

각자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온 제각각의 사람들이

어느 날 병이 생긴 것을 안다 하여

이전의 삶을 전부 집어던진 채

모두가 한 방향을 향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노인이 장수를 열망하는 것이 아니듯,

모든 환자가 완쾌만을 희망하지는 않는다.

돈, 명예, 승진, 건강 같은 보편적 가치를 원할 때에는

세상이 쉽게 수긍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간절히 원할 때에는

많은 의구심을 받게 된다.

그게 정말 그럴만한 가치가 있냐고,

그런 건 나중에 해도 되지 않냐고.

그리고

 후회하지 않냐는 질문을 끝없이 받게 된다.






 

암에는 완치라는 개념이 없다.

5년 내 동일 기원의 암세포가 자라나지 않는다면

일단 종결된 것으로 여긴다.

관해, 라 부르는 종결 지점에 닿을 때까지

5년 동안 몇 개월마다 검사를 받는다.

검사를 받으러 갈 때마다 나는

주변 장기들을 다 떼는 게 나았다거나

왜 방사선 치료를 받지 않았냐고 하는

무신경하고 아픈 이야기들을 들어야 했다.

나는

행여 재발했다는 결과를 보게 되더라도

이만하면 되었다고 스스로 여길 만큼

충만하게 지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5년은 다시없을 만큼 아름다웠고 

모두의 예상과 달리 암은 재발하지 않았다.




 

믿기 어렵겠지만

세상에는 안온한 일상을 갈망하는 이들이 있다.

중요해 보이는 것들을 미련 없이 놓고

별것 없는 일상을 택하는 이들이 있다.

철이 없어서, 어려서, 어리석어서 그런다는

쓴 소리를 줄곧 듣지만

보란 듯이 내놓을 것도 없는 이들,

그렇지 않음을 결과로 증명해 보일 수도 없고

누구에게, 왜 증명해 보여야 하는지 알 수도 없는 일들.

세상의 말대로

그들은 어리석고 어리고 철이 없는지도 모른다.

가진 것이 없어서, 혹은 

가지게 될 것을 몰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욕망이 별것 아닌 듯 보이는 까닭은

당신이 이미 그것을 가진 뒤

중요하다는 생각을 않은 채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탈한 오늘, 프롤로그
글사진 문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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